천사 섬 역사/인물

민권운동의 선구자 김이수 선생

천사 섬 2008. 7. 25. 08:54

김이수 선생의 묘소는 흑산면 본도에 있다. 그가 살았던 흑산면 대둔도에 있지 않고 흑산도에 있는 이유는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마을 주민들이 본도에 묘지를 미리 마련해서 제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묘지는 흑산도 이미자 노래비가 있는 전망대 언덕의 아래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흑산도 사람들도 이곳에 김이수 선생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아담한 크기의 묘지에 오랜 세월의 때가 묻어 있는 묘비 하나가 세워져 있고, 비문에는 "璿源錄郎廳金公之墓(선원록낭청금공지묘)"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김이수 선생을 "낭청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묘비에는 갓머리가 씌워져 있는데, 관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후손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김이수 선생은 누구인가?

김이수 선생은 조선후기 1700년대 중·후반에 지금의 흑산면 대둔도에 살면서, 흑산도를 비롯한 인근 섬 지역 사람들의 삶을 위한 민권운동의 선구자로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김이수'선생은 이름 난 학자도 아니고, 높은 관직 생활을 했던 정치인도 아니었다. 1791(정조 15)년 5월 2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흑산도(黑山島) 백성이 닥나무 세금 폐단으로 인한 원통함을 징을 쳐 호소하니, 이를 시정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지칭하는 "흑산도의 백성"이 바로 '김이수'선생 이다.

김이수 선생은 250여 년 전 지금의 흑산면 대둔도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불합리한 세금 제도로 도서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흑산도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참혹한 생활을 겪게 되자, 이를 보다 못해 폐단을 개혁하고자 민중의 대변인이 되어 개혁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섬사람들은 가중한 세금 폐단으로 인해 "섬도 섬이 될 수 없고, 백성도 백성이 될 수 없다"며 섬을 버리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1767년부터 약 40여 년의 세월동안 섬 주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 폐단을 시정코자 노력했으며,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어 내기도 하였다. 당시 관료들은 '김이수'선생의 활동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민중의 권익을 위해 개혁을 소리 높여 외쳤다.

'김이수'선생의 활동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791년 정조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擊錚)'을 올린 일이다. 격쟁은 임금의 행차 길에 징이나 꽹꽈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후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는 당시 흑산도민들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인 '닥나무 세금'을 시정하기 위해 관청이나 상부에 소송을 내고 수 차례 시정을 요청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천리만길 한양까지 찾아가 임금에게 직접 개혁을 호소하였다. 김이수 선생이 격쟁을 떠나기 전에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이수 선생의 격쟁은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현군(賢君)이었던 정조 임금에게 받아들여져 이에 대한 폐단이 시정되었다. 그 결과 다시 섬으로 되돌아오는 주민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이야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를 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200여 년 전 절해고도로 인식되던 흑산도에서 망망대해를 거쳐 한양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고행의 길이었을 것이다. 바람에 운명을 맡긴 풍선배에 몸을 싣고 오직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신념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민권 운동의 선구자다운 면모이다.

'김이수'선생의 존재와 활동사항은 그동안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후손들의 노력으로 '김이수'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12년에 작성된 '전기(傳記)'와 관련 기록이 전해옴이 밝혀지면서,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은 단순히 한 개인의 활동상황 만이 아니라 조선후기 사회상과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것이다. 김이수 선생의 활동은 단순히 폐단의 금지를 요청하는 차원이 아닌 폐단에 대한 시정안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김이수'선생이 개혁운동에 대한 실천가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목포, 신안을 비롯한 서남해안권은 과거부터 야당성향이 강했고, 근현대에는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고장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민권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이수'선생의 존재는 그러한 민주화 운동의 맥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출저:신안 향토사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