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安郡 沿革 및 行政區域 地名由來
신 안 군(新安郡)
연 혁
□ 상고시대
ㅇ 마한의 고지(古地)임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ㅇ 백제시대 아차산군(阿次山郡), 거지산현(居知山縣),고록지현 (古綠只縣)으로 분포
ㅇ 757년(경덕왕 16) 아차산군(阿次山郡), 압해군(壓海郡)으로 개칭 갈도(碣島), 염해(鹽海), 안파현(安波縣)을 영속
거 지산현(居知山縣), 고록지현(古綠只縣)을 각각 안파현, 염해현으로 개칭 압해군에 영속
ㅇ 892년(진성여왕 6) 견훤 광주기병으로 그 세력 안에 들어감
ㅇ 909년(견훤 18) 왕건의 침공으로 고이도(皐夷島)가 무너지고 태봉국에 속함
ㅇ 935년(태조 18) 압해군(壓海郡)이 나주의 속현이 됨
ㅇ 고려초(태조대) 갈도현(碣島縣)이 육창현(六昌縣)으로 바뀌어 영광군에 속현
ㅇ 고려초(태조대) 염해현(鹽海縣)이 임치현(臨淄縣)으로 바뀌어 영광군에 속현
ㅇ 고려초(태조대) 안파현(安波縣)이 장산현(長山縣)으로 바뀌어 나주목에 속현
□ 고려시대
ㅇ 936년(신검 1) 후백제가 망하고 고려에 속함
ㅇ 940년(태조 23) 안파현, 갈도현, 염해현을 각각 장산현, 육창현, 임치현으로 개칭. 압해군(壓海郡)현(縣)으로
강등 장산현과 함께 나주목에 영속
ㅇ 1018년(현종 9) 육창현(陸昌縣), 염해현(鹽海縣), 임치현(臨淄縣)을 영광군에 영속
ㅇ 1363년(공민왕 12)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흑산도주민, 나주목(羅州牧)으로 피난하여 영산현(榮山縣)이라 함.
곧 영산군(榮山郡)으로 승격
□ 여말선초기
ㅇ 압해현과 장산현이 나주로 읍치를 옮김
□ 조선시대
ㅇ 1887년 11월(고종 24) 비금, 도초도에 대한 침탈과 토색을 막기 위해 해남현에 영속
ㅇ 1891년2월(고종 28)나주목, 자은도, 장산도, 압해도에 대한 읍진(邑鎭)의 침탈을 막기위해 영광군으로
이속
ㅇ 1892년 10월(고종 29) 나주목, 하의도, 상하태도에 대한 읍진 이교배(吏校輩)들의 침징(侵徵)을 막기
위해 광주목에 이속
ㅇ 1896년(건양 1) 칙령 제13호(1896. 2. 3)에 의해 지도군 (智島郡) 설치. 이 때 전 지도진에 부속되었
던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 5군의 도서 117곳이 지도군 관할
ㅇ 1896년 8월(건양 1) 16면 행정구역이 갖춰짐.
ㅇ 1897년(건양 2) 칙령 제14호(1897. 3. 7)에 의해 비금도, 도초도 가 지도군에 편입되어 새롭게 비금면이 생김
으로써 17개면 확정
□ 대한제국
ㅇ 1903년 지도군에 속해 있던 도초가 진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고군산면, 위도면, 낙월면 제외)이 무안군에 편입. 완도군의 팔금면과 진도군에 속
해 있던 도초면, 안창면, 기좌면이 무안군에 편입. 지도군의 고군산면이 전북 옥구군에, 위도면과 낙월면
은 영광군에 편입됨.
ㅇ 1917년 안창면(安昌面)과 팔금면(八禽面) 전역을 안좌면(安佐面)으로 개칭
ㅇ 사옥면(沙玉面)과 선도면(蟬島面)의 선도(蟬島), 병풍도(屛風島)를 지도면에 편입
ㅇ 선도면의 고이도(古耳島), 매화도(梅花島)를 압해면에 편입
ㅇ 선도면의 당사도(唐司島)를 암태면에 편입
ㅇ 선도면 폐지
□ 대한민국
ㅇ 1963. 1. 1 법률 제1175호로 무안군 흑산면 우이도리를 도초면으로, 진도군 조도면 마진도리를 무안
군 장산면으로 편입
ㅇ 1964. 8. 2 무안군 조례 제86호로 흑산면가거도출장소, 도초면에 우이도 출장소, 안좌면에 팔금도 출장소,
지도면에 증도출장소 설치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로 무안군에서 신안군을 분군
ㅇ 1971. 6. 1 신안군 조례 제35호로 압해면 매화도 출장소 신설
ㅇ 1974. 10. 18 신안군 조례 제189호로 하의면에 상하태출장소 신설
ㅇ 1980. 3. 17 신안군 조례 제413호로 지도면에 선도,흑산면에 태도, 안좌면에 자라도출장소 신설
ㅇ 1980. 7. 9 신안군 조례 제435호로 흑산면 홍도리에 신안군 홍도 관리사무소 신설
ㅇ 1980. 12. 1 대통령령 제10050호로 지도면을 지도읍으로 승격
ㅇ 1983. 2. 4 신안군 조례 제596호로 흑산면에 홍도출장소 신설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지도읍 증도출장소가 증도면으로 하의면 상하태출장소가 신의면
으로, 안좌면 팔금도출장소가 팔금면으로승격 동호로 진도군 조도면 만재도리가 흑산면에 가사도리일부
(고사도, 평사도, 송도)가 신의면으로 편입
ㅇ 1986. 1. 10 신안군 조례 제753호에 의거 신안군 홍도관리사무소 폐지
ㅇ 1988. 3. 5 신안군 조례 제824호로 증도면에 병풍도출장소 신설
ㅇ 1989. 1. 1 신안군 조례 제870호로 흑산면에 대둔도출장소(오리, 도목리, 수리), 압해면에 고이도
출장소 신설
ㅇ 1990. 8. 1 대통령령 제13046호로 장산면 저도(소저도,작도,송도,골도,희어도)가 진도군 진도읍으로
이속
ㅇ 1991. 4. 1 신안군 조례 제1029호로 흑산면 홍도출장소를 신안군 홍도관리사무소로 승격
ㅇ 1991. 4. 1 신안군 조례 제1030호로 흑산면 홍도 출장소 폐지
명칭 유래
1969년 무안군에서 분군하면서 새로운 군이라는 뜻으로 신안군(新安郡)이라 명칭
지 도 읍(智島邑)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고록지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염해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임치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 영광군에 속하다가 이후 나주목에 이속
ㅇ 1682년(숙종8) 지도에 만호진(萬戶鎭) 설치
ㅇ 1896년(고종 33) 지도진이 폐지되고 지도군 설치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이 폐지되고 지도면으로 개편되어 무안군에 편입
ㅇ 1917년 사옥면(沙玉面), 선도면(蟬島面)의 선도, 병풍도(屛風島) 편입
□ 대한민국
ㅇ 1964. 8. 2 무안군조례 제86호에 의하여 증도출장소 설치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속함
ㅇ 1975. 2. 25 무안군 해제면과 연륙
ㅇ 1980. 3. 17 신안군 조례 제413호에 의하여 선도 출장소 설치
ㅇ 1980. 12. 1 대통령령 제10050호로 지도면이 지도읍으로 승격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지도읍 증도출장소를 증도면으로 승격하여 독립
명칭유래
무안반도의 최남단 해안지방으로 유물(패총)로 볼 때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왔으나 지도라는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권 35 나주목 유천조에 처음 나타남.
□ 내양리(內楊里)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 군내면의 날구지 바깥쪽이 되므로 밭 날구지 또는 벗테의 안쪽이 되
므로 내양이라 부름.내양리 밖에 있는 외양, 마을 생김새가 고양이 머리 같다하여 묘두, 마을이 가재형이
라 하여 가정, 피리형이라 하여 적동,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하여 송항,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형
상이라하여 둔곡 마을로 형성된 곳.
□ 봉리(鳳里)
마을의 뒷산이 봉황(鳳)의 형국으로 생겼다하여 봉골,봉굴, 봉곡, 봉동, 봉리(鳳里)라 칭함.깊은 골짜기에
집을 지어 살았다하여 깊은몰, 또는 심동과 서당이 있었다하여 서당골, 서동, 뒷산에 금맥이 있다 하여 황금
마을로 형성된 곳.
□ 어의리(於義里)
마을의 형상이 늘어진 모양이므로 느리섬, 느리라 부르다가 어의도 또는 어의라 하였음.
해산물을 보자기에 쌓은 형국이라하여 포작도라 하였으며, 마을 크기에 따라서 대포작과 소포작으로 나누
어짐.
□ 감정리(甘井里)
처음에는 덕기동(德基洞)이라 부르다가 이후 지명을 선정하는 국지관이 들러 목이 마르던 차에 우물물을 먹
어본 후에 물맛이 좋다하여 달 감(甘)자와 우물 정(井)자를 써서 감정이라 하였음.
지형이 새가 나는 형국으로 조비, 용 형국의 용산동,마을 앞 연못에 흰 연꽃이 만개한다하여 백연동, 금맥이
있다하여 금출, 마을의 땅밑이 바위로 되어 있다하여 점암, 모래가 많다 하여 고사 마을로 형성된 곳.
□ 읍내리(邑內里)
읍동, 읍서, 송도가 합해진 곳으로 본래 지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지도군청이 있었으므로 읍내라 하였음.
마을이 동쪽에 위치 한다하여 읍동, 서쪽의 읍서, 소나무가 많아 솔섬 또는 송도 마을로 형성된 곳.
□ 광정리(廣井里)
물이 풍부하고 좋다는 뜻에서 광정이라 함.마을 앞산위에 달이 떠오르면 마을이 환히 비친다 하여 월산, 마을
지형이 길다하여 장동, 마을에 황토가 많아 적거, 지형이 방아다리처럼 생겼다하여 용교, 버드나무가 많아서
백양골 또는 백양마을로 형성된 곳.
□ 자동리(自東里)
전주이씨 배도공파의 10세손인 이철의 호가 자신당(自新堂)이여서 최초의 마을이름을 자신당 골이라 부르다가
산등성이 동쪽이 되므로 자동이라 함. 지형이 용 다섯 마리 형국인 오룡, 효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하여 효지,
마을이 서쪽이라하여 자서, 산 언덕 중간에 마을이 위치한다하여 중산동 마을로 형성된 곳.
□ 태천리(台川里)
마을의 동서쪽에 내가 흐르고 지형이 타래처럼 생겼다하여 타래라 부르다가 태천으로 개칭함. 연화수도라
는 명당이 있다하여 연화,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 안마 마을로 형성된 곳.
태천, 태이, 연화, 회산, 루동, 안마로 이루어져 있음. 탄동리(灘洞里)원달 마을과 두류산 사이에 여울이 있어
원달마을로 가려면 여울을 건너 왕래 한다하여 여울 탄(灘)자를 써서 탄동이라 부름.
석탑 같은 돌이 많다하여 탑(塔) 자와 행인의 모습이 신선 같다 하여 탑선, 지형이 반달형으로 원달, 안에 있는
섬으로 내도 마을로 형성된 곳 탄동, 탑선, 원달, 내도, 하탑선으로 이루어져 있음.
□ 당촌리(堂村里)
본래는 용이 승천한 마을이라하여 용굴이라 부르다가 이후 지형이 밭 이랑과 모양이 같다하여 묘동 이라고
도 하며 당집이 있었다해서 당말, 당몰, 또는 당촌이라 함.
□ 선도리(蟬島里)
순흥안씨 선산 혈맥의 주혈이 거미혈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하며 지형이 매미처럼 생겼으므로 맵재 또
는 선치도, 선도라 불림,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매계, 돌이 많다하여 석산, 큰 마을인 대촌, 마을이
북쪽에 위치한 북촌, 거미혈의 주동 마을로 형성.
증 도 면(曾島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고록지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염해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임치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 영광군 사옥면에 속하다가 이후 나주목에 이속
ㅇ 1682년(숙종8) 지도진에 속함
ㅇ 1683년(숙종9) 위도에 수군진영이 설치되면서 위도 관하에 소속
ㅇ 1896년(고종33) 지도진이 폐지되고 지도군 설치로 지도군에 속함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이 폐지되고 지도면으로 개편되어 무안군 지도면에 속함
□ 대한민국
ㅇ 1964. 8. 2 무안군조례 제86호에 의하여 지도군에 증도출장소 설치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 지도면에 편입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거 지도읍 증도출장소에서 증도면으로 승격
ㅇ 1988. 3. 5 신안군 조례 제824호로 병풍도 출장소 설치
명칭유래
예부터 이곳은 물이 적은 곳이라하여 시리섬(시루섬)이라 부르다가 전(前)증도와 후(後)증도의 두 개 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 두섬이 간척사업으로 합쳐졌다는 의미로 증도로 불리워짐.
□ 증동리(曾東里)
예로부터 물이 적은 섬이라 하여 시리섬 또는 전증도(前曾島)뒤에 있다 하여 후증도(後曾島, 뒷시리)로
불리다 1902년 지도면장이 증동이라 고쳐 부른 후 지금까지 증동이라 함 증도의 동쪽 마을이 되므로 증동
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음 서쪽에 마을이 있는 증서, 섬이 활같이 굽어 있는 곡도, 바위가 많은 곳이라 하여
광암이 합해진 곳.
□ 방축리(防築里)
마을에 큰 방죽이 있어 방축 또는 방축동, 방죽끼미라 불림. 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 섬이 많다하여 방축이라 불
리기도 함 자연마을인 방축, 오산, 염산, 검산이 합해진 곳.
□ 대초리(大棗里)
예전에는 후증도 앞에 있다하여 앞실 이라 부름. 이후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이 자란다하여 대초몰, 대초동이라
부르다가 대초로 개칭.솥이 없으면 물을 담을 수 없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인덕정, 섬 모양이 꽃 봉우리
같다하여 화도, 마을이 동쪽을 향하고 햇빛이 충만 한다 하여 등선, 제방을 막아 곡창지대가 될 것이라하여 장고
가 합해진 곳우전리(羽田里)길게 뻗은 벌이 되므로 깃밧 또는 우전이라 하였음.
옛날 기러기 떼가 한 겨울을 지내고 갔다해서 길밭이라 부르다가 우전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음.우동, 우서를 합
하여 마을이 합해진 곳임.
□ 병풍리(屛風里)
마을 서북쪽의 산이 바닷물과 바람에 씻겨 병풍처럼 보인다하여 병암이라 부르다가 이후 병풍이라 개칭.
자연마을인 병풍, 기점이 합해진 곳임.
임 자 면 (荏子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고록지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염해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임치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 영광군에 속하다가 이후 나주목에 이속
ㅇ 1711년(숙종 34) 임자진 설치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이 폐지되고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속함
명칭유래
ㅇ 낮은 산이 각기 떨어져 있으므로 임자도라 하였고,섬의 모양이 깨를 뿌려 놓은 형세라하여 임자도(荏子
島)라 불리었음.
ㅇ 주민들은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하여 “육섬”이라고 부르기도 함.
ㅇ 임자도에는“용 낳은 굴”이라고 불리는 굴(용난굴)이 있는데 이곳은 약 400년 전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
진리(鎭里)1711년 임자진이 설치 되면서 마을에 진지가 있어 수군이 진을 치고 있다하여 진리라 칭함.
□ 수도리(水島里)
작은 섬인데도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하여 수도라 함.사도세자를 모시는 무산단이 있는 곳.
□ 도찬리(道贊里)
1700년 경주 이씨가 처음 정착하였을 때 도찬마을의 산세가 좋고 주위 호수의 물이 맑고 넓다하여 대청이
라고 부르다가 1900년 도찬으로 고쳐 현재에 이름.옛날 마을 앞 모래사장이 마당 같다하여 장불이라 부르
다가 전장포로 개칭한 마을과 임자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하여 괘일, 괘길, 말을 방목하였다 하여 유래된
마방촌이 합해진 곳.
□ 대기리(大機里)
마을 앞산에서 본 형태가 베틀 같다고하여 한틀 또는 대기라 함.
삼면이 산으로 싸여 있어 삼막,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명, 크게 일어나라 하여 대흥, 나르는 갈매기 같
다하여 구산, 학교가 있는 마을 이라하여 교동, 다른 곳으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한다해서 회산, 마을이 산
속으로 뻗혀 있어 장동이라는 마을로 합해진 곳.
□ 광산리(光山里)
마을 뒷산에 금이 묻혀 있다하여 금광산으로 부르다가 무안군에 속해 있을 때 광산으로 개칭.
광산리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하우리가 합해진 곳.
□ 재원리(在遠里)
임자 본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하여 재원이라 함.
중국으로 가는 뱃길 목이 되어 재원원(在遠院)을 두어 재원도라 불렸다는 설도 있음.
섬이 마주보며 돕고 있는 지형이라 부남군도(扶南群島)라 지명이 붙여진 부남과 재원이 합해진 곳.
□ 삼두리(三頭里)
100년전까지는 산머리라 부르고 있었는데 마을 뒷산과 앞산, 옆산의 뻗어 나가는 형국이 머리와 같은 모양이라
세머리라 부르다가 지금은 삼두라 개칭.
마을 지형이 세 머리로 되었으므로 삼머리 또는 삼두라 하였다는 설도 있음.
마을 우측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붓처럼 생겼다 하여 필길, 옛날 모시가 많이 생산되어 모시동 또는 저동,
먼 산 밑에 마을이 있어 원상, 물이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부자가 많이 산다하여 부동, 용의 꼬리가 희롱한
모습이라 하여 희용기미 마을로 합해진 곳.
□ 이흑암리(二黑岩里)
예전에는 대둔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마을이 일찍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흑암이라 부름.
이후 1830년부터 대둔산 아래 양지 바른 곳으로 마을을 옮겼으며, 여섯개의 바위가 있어 육암 또는 마을
앞에 검은 바윗돌이 있으므로 이흑암 이라는 설도 있음
세개의 산봉우리가 새의 형상이라하여 조삼, 마을 뒷산이 연꽃 형상이라 하여 화산, 마을 모양이 두개의 머리
처럼 생겨 두머리라 부르다가 대머리로 개칭한 마을로 합해진 곳.
자 은 면(慈恩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노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갈도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1377년(고려 우왕 3)에 자은 구영 설치
□ 조선시대
ㅇ 초기에는 나주목에 편입되었다가 영광군에 이속
ㅇ 이후 조선후기 나주목 이속
ㅇ 1896년(고종 33) 지도군의 설치로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행정구역 개편 시 고장, 구영, 대율, 면전,백산, 송산, 유각, 유천, 한운의 9개리를 합하여
무안군의 자은면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명칭유래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을 따라 참전 했던 중국인 두사춘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이탈하
여 피신하기 위해 전전하다 본도에 도착하여 지형지세 및 인심이 좋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신이 돈후 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됨을 감사히 생각하고 베풀어준 뜨거운 사랑(慈)과 은혜(恩)를 못 잊어서 자은도라 칭했다고
함. 그러나 그 이전부터 자은(慈恩)이라는 명칭이 사료에 등장하고 있어 명칭의 유래는 훨씬 더 오래 되었음
을 알 수 있음. 다만 자은이라는 명칭에 담긴 지역인의 의식이 후대 두사춘 설화에 결부된 것으로 보임.
□ 한운리(閑雲里)
지형이 구름 가운데 반달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한운이라 함.
구미(후미)로 되었으므로 한구미 또는 한운리라 불렸다는 설도 있음.
마을 서북쪽 고도(姑島) 할미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장수 한다하여 둔장, 마을 동쪽 지점에 감두(柑頭)가 교량
역할을 한다하여 옛다리 또는 고교라는 마을이 합해진 곳.
□ 송산리(松山里)
뒷개 옆에 위치한다하여 뒷개 또는 후포라 부르다가 이후 뒷산에 소나무가 많다하여 송산이라 개칭.마을이 많은
산속에 위치하여 다산, 두모 마을이 합해진 곳.
□ 대율리(大栗里)
마을에 큰 논배미가 있으므로 한배미 또는 대율이라 함.원래 한야리(寒夜里)라 부르다가, 이곳을 지나던 도승
이 마을 형세가 큰 밤 형국이니 대율리라 했다는 설도 있음.
마을이 새로 생겼다하여 신흥, 참새골이라 부르다가이후 진천으로 바뀐 마을이 합해진 곳.
□ 유천리(柳川里)
마을내에 내천(川)자형의 소하천이 형성되어 있고 하천 주위에는 수양 버들나무가 늘어져 있어 마을 이름을
“버드네골”이라고 부르다가 훗날 유천이라 칭함. 바다 가운데 섬들이 못 가운데 떠 있는 연꽃 봉우리 같다하여 연화
옥 지라 부르다가 이후 욕지로 바뀐 마을이 합해진 곳.
유각리(鍮脚里)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놋다리밟기를 하였으므로 놋다리라 불림.
옛날에 놋쇠를 치는 대장간이 있어서 마을 내에 다리를 놋쇠로 놓았다고 해서 놋다리로 부르다가 한자어 표기 시
유각이라 개칭했다는 설도 있음.
면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선착장이 있어 남진, 길다란 제방이 있어 장제, 마을 뒷산 절벽 바위가 병풍 같다하
여 흑병이라 부르다가 이후 문평으로 바뀐 마을과 뒷산에 금이 있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온다하여 금
포,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면 여기서 머물다 간다하여 뱃길이라 하였는데 이후 백길로 바뀐 마을이 합
해진 곳.
□ 면전리(綿田里)
지형이 면견형(眠犬形)이라 하여 면구래(眠拘來)라 부르다가 이후 마을에 목화를 많이 재배하면서 면전이
라 개칭.자연마을인 구래가 합해진 곳.
□ 백산리(白山里)
해변을 끼고 있는 마을 전체가 흰 모래로 되어 있다하여 백산리라 칭함.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인 와우, 만조 시 분리되고 간조시 연결되는 경계라 하여 분계, 신성마을이 합해진 곳.
□ 구영리(舊營里)
전에는 당포(唐浦)라 부르다가 조선시대 진영(鎭營)이 있었던 곳이라하여 구영이라 불림. 당시 사용되던 큰
우물이 남아 있음. 옹관고분이 발견 되기도 함. 장고마을이 합해진 곳.
□ 고장리(古場里)
옛날에는 북치고노는 마당이란 뜻으로 고장(鼓場)이라 부르다가 이후 사장(射場) 옛터였다하여 고장(古場)
이라 개칭.명사십리가 있고 배들이 왕래하는 포구라하여 사월포, 마을이 바깥쪽에 위치한 외기, 안쪽에 위치
한 내기 마을이 합해진 곳.
비 금 면(飛禽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노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갈도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육창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는 영광군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나주목에 속하다가 이후 해남현(1887년 고종 24)에 이속
ㅇ 1897. 3. 7 칙령 제14호에 의해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대, 용소, 수치, 도고, 가산, 지당, 구림, 신원, 고서, 덕산, 내월, 죽림,수대 등
13개리로 개편하여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명칭유래
조선시대 후기 섬의 전체적인 모양이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날비(飛)”“새금
(禽)”자를 써서 비금도, 비금면 이라 하여 당두, 대두 등 44개리를 관할하기 시작함.
□ 광대리(廣大里)
광대, 당두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된 이곳은 앞들이 넓고 크므로 광대골 또는 광대라 함.
□ 용소리(龍沼里)
마을 앞에 천연 연못(30,142㎡ , 깊이 3m)이 있는데 이곳에 용이 살았다고하여 용(龍)방죽이라 하다가 후에 한자로
표기 시 용소라 개칭.
□ 도고리(道古里)
나주목 시대에 조세창고가 있다하여 도고촌(道庫村)이라 칭하다가 이후 도고로 개칭. 뒷산에 큰 독(돌)이
있어 도고라 불렸다는 설도 있음.
□ 가산리(佳山里)
본래 갈대가 많았으므로 갈침매 또는 가출섬, 가출도, 가산이라 하였음. 노대도와 뒷산 형상이 여러 사람이
늘어서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한 나배 마을이 합해진 곳.
□ 지당리(池堂里)
당(堂)이 있던 당산마을과 연못이 있던 지동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당이라 하였음. 소의 형상 같다 하여 우산, 연못
이 있던 자리라 하여 지동, 연못과 버드나무가 있다하여 신유 마을이 합해진 곳.
□ 구림리(舊林里)
한문 교육과 유교사상 등 옛 풍습을 지켜온다하여 구기 마을과 천연 개방죽(연못)에 송림이 울창한 수림마
을의 이름을 따서 구림이라 하였음. 수림, 송림, 용호, 구기를 통합하여 형성된 마을.
□ 신원리(新元里)
새로 생긴 마을인 신촌과 원평의 이름을 따서 신원이라 하였음. 원평은 마을에 조류가 많이 날아들어 오리평
이라 하였으나 마을이 형성되면서 원평(먼들)이라 하였음. 마을이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루어 평림, 옛날에
꽃치섬이라 부르다가 이후 붉은목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자항으로 바뀐 마을이 합해진 곳.
□ 고서리(古西里)
고목나무가 많이 있고 움막을 지어 살았다는 고막 마을과 선왕산(仙旺山)주변이 첩첩산중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서산마을의 이름을 따서 고서라 하였음. 고막, 서산, 칠팔도를 합하여 형성된 마을.
※고목나무가 있고 움막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는 고막마을과 절골산(선왕산) 주변과 서쪽에 해가 지는 지북
산이 있는 서산마을의 이름을 따서 고서리 마을이라 했음.
□ 덕산리(德山里)
마을이 크고 예로부터 사람됨이 어질다하여 지칭한 대덕마을과 선왕산 줄기의 산골 마을로 물 맑고 산수
가 좋은 한산마을의 이름을 따서 덕산 이라 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다 하여 망동, 면의 중심 마을이라 하
여 붙여진 읍동 마을이 합해진 곳.
□ 죽림리(竹林里)
마을 뒷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선왕산과 기림산을 잇는 구릉에 큰 고개가 있는 죽치 마을과 송림이 울창
한 임리의 이름을 따서 죽림이라 하였음.
□ 내월리(內月里)
내촌과 월포의 이름을 따서 내월이라 하였음.마을 형태가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안동
네, 내촌이라 하였으며, 달이 뜨면 마을의 어느 집에서도 잘 보이고 마을 앞이 바다의 개천이어서 월포라 한 마
을이 합해진 곳.
□ 수대리(水大里)
대두와 수도의 이름을 따서 수대라 하였음.마을의 산이 우뚝 솟아 사람 머리형태를 하고 배들이 이 산을 기
점으로 항해 했다 해서 대두(大頭)라 하였으며, 바다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수도라 함. 대두, 수도, 송치
를 합하여 형성된 마을.
□ 수치리(水雉里)
마을의 형세가 꿩이 졸고 있는 것 같다하여 수치라 함.
흙이 검으므로 거메섬, 숯섬, 또는 수치도, 흑도라 불렸다는 설도 있음.
수치마을의 변두리에 있다 하여 가어지로 칭한 마을이 합해진 곳.
도 초 면 (都草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차산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압해군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조선 중기까지는 영광군에 속함
ㅇ 1887년 (고종 24) 해남현에 이속
ㅇ 1897. 3. 7 칙령 제14호에 의해 지도군에 편입
□ 대한제국
ㅇ 1903년 진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2년 무안군 조례 제35호에 의하여 우이도 출장소 설치
ㅇ 1963. 1. 1 법률 제1175호에 의거 흑산면 우이도를 편입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명칭유래
나주목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도치도(島雉島)라 하였다.
부근에 수치, 사치, 경치, 팔금, 비금 등 조류형국(鳥類形局)의 도서중 큰 섬이라 해서 도치도(都雉島)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고, 당나라와의 무역 기항지로서 당나라의 수도처럼 초목이 무성하고 지형이 고슴도치
처럼 생겼다 하여 도초(都草)라 함.
□ 발매리(發梅里)
지형이 바리때 처럼 생겼으므로 바리매 또는 발매라 하였다는 설과 매화꽃이 만개한 모습이라하여 발매라
하였음.
옛날 섬에 불을 피워 나룻배를 이용했다하여 불섬, 또는 화도와 마을을 가려면 개울과 뻘 등을 넘는다 하여 월
포,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짓는다 하여 춘경 마을이 합해진 곳
□ 지남리(指南里)
마을의 주택방향이 남쪽으로 향해 있고 지남산 남쪽이 되므로 지남이라 하였음. 지남마을의 북쪽이라 하여 지
북, 동쪽 마을이라하여 지동, 대나무가 많다하여 붙여진 죽도 마을이 합해진 곳.
□ 외남리(外南里)
지남의 바깥쪽 마을로 밭지남, 외지남, 외남이라 하였음. 외남상, 외남하, 신촌을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
□ 오류리(五柳里)
옛날에는 오리나무가 많이 자란다하여 오릿골, 오리동 또는 오류라 하였음.
엄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붙여진 엄목, 감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붙여진 시목이 합해진 곳.
□ 수항리(水項里)
마을이 물 흐르는 어귀가 됨으로 전에는 물목이라 부르다가 이후 수항 이라 개칭. 마을 맞은편에 있는 큰 산
의 형상이 마치 화(火)자로 보인다 하여 그 방지책으로 수(水)자를 써서 수항이라고도 함.
활(弓)의 목에 마을이 위치한다하여 활목(弓項), 마을 입구에 개울이 있어 나박포라 칭한 마을이 합해진 곳.
□ 죽련리(竹連里)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죽련이라 하였음 신교마을과 합해진 곳.
□ 고란리(古蘭里)
옛날에는 난초가 많이 자란다하여 고란이라 하였음.
골짜기 안이 되므로 고란(골안)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음.고란리 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난말과 합
해진 곳.
□ 이곡리(二谷里)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배낭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고란과 만년 마을 쪽에서 뻗어 내리는 두 줄기
산 계곡 아래 위치한다하여 이곡으로 개칭. 이곡상·하로 나누어지며 마을 지세가 새의 둥지 같다하여 조진과
소를 많이 싣고 나갔다하여 붙여진 소신마을이 합해진 곳.
□ 만년리(萬年里)
밤나무 숲이 있으므로 밤숫굴, 밤석골, 밤석동이라 하였으며 만년 동안 번영할 수 있다하여 만년이라 함.
만년, 도락, 한발을 합하여 형성된 마을.수다리(水多里) 건답이 많다 하여 옛날에는 건들 또는 건야라 부르
다가 이후 수답(水畓-무논)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수다로 개칭. 수다, 용동, 나포를 합하여 형성된 마을.
□ 우이도리(牛耳島里)
섬의 지형이 소(牛) 귀 모양이라하여 소구섬, 소구 또는 우개도라 부르 다가 우이도(牛耳島)로 칭함. 조선시
대에는 소흑산도로 불림.
마을형상이 돼지머리 같다하여 저항, 마을이 동서로 나눠져 있어 동서, 선착장 끝에 있는 마을이란 선창구
미,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 한다하여 대초,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 죽도, 진리, 예리, 성촌 마을로 형성된 곳.
흑 산 면 (黑山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827년(신라 흥덕왕 2)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교역 시 중간기착지임.
□ 고려시대
ㅇ 나주목에 속함
ㅇ 1363년(공민왕 12) 고려말 왜구침입으로 흑산도 주민 나주목으로 피난 영산현(榮山縣)이라 함 곧 영산군
으로 승격
□ 조선시대
ㅇ 1888년(고종 25) 흑산진을 설치하여 만호를 둠.
ㅇ 1896년(고종 33)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3. 1. 1 법률 제1175호로 우이도를 도초면에 이속
ㅇ 1964. 8. 2 무안군 조례 제86호로 가거도출장소 설치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80. 3. 17 신안군 조례 제413호로 태도출장소 설치
ㅇ 1980. 7. 9 신안군 조례 제435호로 홍도리에 신안군 홍도관리 사무소 설치
ㅇ 1983. 2. 4 신안군 조례 제596호로 홍도출장소 설치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진도군 조도면 만재도리가 흑산면에 편입
ㅇ 1986. 1. 10 신안군 조례 제753호에 의거 신안군 홍도관리사무소 폐지
ㅇ 1989. 1. 1 신안군 조례 제870호로 대둔도출장소 설치
ㅇ 1991. 4. 1 신안군 조례 제1029호로 흑산면 홍도출장소를 신안군 홍도 관리사무소로 승격
ㅇ 1991. 4. 1 신안군 조례 제1030호로 흑산면 홍도출장소 폐지
명칭유래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2.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와 함께 흑산군도를 이루면서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黑山島)라 함.
□ 진 리(鎭 里)
면의 중심지로 모든 마을을 지배한다 하여 진리라고도하고 흑산 진영이 있었으므로 진말, 진마 또는 진촌, 대진
리라 부르다가 읍동을 합하여 진리라 함.
□ 예 리(曳 里)
산줄기를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목이 되므로 끌미, 예미, 예촌이라 하다 후에 예리로 개칭되었음.
수림이 울창하다 하여 청촌, 길게 뻗어 있다하여 천촌, 모래가 있다 하여 소사, 대밭이 우거진 죽항, 말이 먹이를
먹는 모양의 마실, 옹달샘처럼 산골 깊이 마을이 위치 한 샘골, 오고 가는데 쉬어가는 곳이라는 가는게 마을
이 합해진 곳.
□ 비 리(比 里)
흑산진(진리) 뒤 산너머가 되므로 전두미, 전디미 또는 비촌, 비지리라 하다가 후에 비리로 개칭하였음. 비
리,마리, 장도, 소장도, 곤촌 마을이 합해진 곳.
□ 심 리(深 里)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굽어져 있으므로 지푸미 또는 심촌이라 하다가 심리로 개칭.
□ 사 리(砂 里)
마을 앞 해변에 모래가 많아 모래미 또는 사촌이라 하다가 사리로 개칭. 영산리(永山里영산홍이 많이 핀다 하
여 영산리라 하였으며 영산, 액기미의 자연마을로 형성.
□ 오 리(梧 里)
생끼미 바깥쪽이 되므로 밖생끼미, 마을 가운데 샘이 있어 질병과 불행한 일이 많다고하여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샘을 옮겨 외정리(外井里)라 하였다가 오동나무가 있다하여 오리라 부름 산세가 복숭아를 닮아 붙여진
도목과 열목이 합해진 곳.
□ 수 리(水 里)
바닷물이 앞뒤에 있으므로 수촌이라 하였는데 물이 풍부하고 맑다 하여 수리라 함.
□ 다물도리(多物島里)
해산물이 풍부하고 여러 종류의 고기가 잡힌다 하여 다물도 또는 다촌 이라 하였는데 1998년 행정구역 명
칭 변경으로 다물도로 개칭.
□ 홍도리(紅島里)
석양 노을에 바다가 붉게 보이면서 붉은 바다가 반사 되어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하여 홍도라 하였음.
□ 태도리(苔島里)
지형이 타래처럼 둥글게 틀어진 섬으로 태사도 또는 태도라 하였음.
섬의 위치에 따라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의 3개 섬으로 형성되었음.
□ 가거도리(可居島里)
기암괴석과 후박나무 숲으로 섬 전체가 이루어져 있고 어종이 풍부하여 사람이 살 만한 곳 이라 하여 가거도라
하였으며, 그후 일제시대에 소흑산도로 잘못불리 우다가 가거도로 개칭. 가장 큰 마을인 대리, 배가 닿은 곳이라 하
여 항리, 산등성에 위치하여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대풍 마을이 합해진 곳.
□ 만재도리(晩才島里)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진 섬이라하여 먼데섬이라 부르다가 이후 재물을 가득 실은 섬이라 하여 만재도라
함.
하 의 면(荷衣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거지산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안파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장산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나주목에 속함
ㅇ 1892(고종 29) 읍진(邑鎭) 이교배(吏校輩)의 침징(侵徵)을 막기 위해 광주목에 이속
ㅇ 1896년(고종 33)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 폐지로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 안군에 편입
ㅇ 1974. 10. 18 신안군 조례 제189호로 상하태출장소 설치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상하태출장소가 신의면으로 독립
명칭유래
신라말기 풍수지리설에 도통한 도사가 전국 지형을 답사 하던 중 이 섬에 들르게 되어 지형을 보니 이 섬의 형태
가 연화 만개 모양이므로 연꽃(蓮)과 뜻이 같은 연꽃하(荷)와 옷의(衣)를 붙여 하의라 불렀다 함.
하의(荷衣)라는 명칭 자체가 연꽃을 상징.
□ 웅곡리(熊谷里)
마을의 생김새가 곰의 모양과 흡사하다하여 곰자리 마을, 곰실 마을로 불리다가 웅곡이라 하였음.
마을 뒤쪽에 포구가 형성되어 북포, 마을 앞 넓은 들이 있다 하여 전광, 버드나무가 서 있는 모양이라 하여
오류동, 햇빛이 잘 비치는 마을이라 허박, 큰 저수지가 있어 방죽골, 개펄에 돌을 놓고 건너 다녔다 하여
노두몰, 바위 형상이 거북 모양이라 하여 구암 마을이 합해진 곳.
□ 어은리(於隱里)
하의도 최초로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앞에 둑을 쌓아 이루어진 동네 즉 언(堰)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언굴, 언
동이라 부르다가 까마귀가 엎드려 숨어 있는 형국이라하여 어은이라 하였음 고기 모양이라 하여 언동, 난을 피해
살던 곳이라하여 피도, 길목에 마을이 있어 간목, 세꾸미 마을로 합해진 곳.
□ 오림리(五林里)
바람이 불면 다섯 곳에서 나는 소리가 각각 달라 우리 국악의 궁상각치우 5음계를 따 오음이라 부르다가 오림으
로 개칭. 동편, 벗원, 유호, 소유호, 봉도, 서편 마을이 합해진 곳.
□ 대 리(大 里)
옛날에는 도청동이라 불렀고 큰 마을이므로 큰 동네,큰 몰, 대리라고 칭함. 동편, 서편, 당두, 남구지의 마을
이 합해진 곳.
□ 후광리(後廣里)
너릿섬의 뒤쪽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뒷너리섬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넓은들이 있어 후광이라 개칭. 종남,전월,
운산, 소포, 개도, 역구, 장병, 문병, 오장, 원후광 마을이 합해진 곳.
□ 능산리(陵山里)
섬이 능선으로 되었으므로 늘메섬, 능메, 능산이라 불림.남북으로 산이 길게 뻗쳐 있고 해안가에 마을이 형
성된 섬마을로 장개섬이라고 불리는 장재도와 마을 뒷산이 능산 형태를 하고 있다하여 능메라고 불리는 능산,
큰 바다에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섬이라하여 대서리, 대야도, 산에 땔감 나무가 많다하여 섶섬 또는 신도로
합해진 곳.
□ 옥도리(玉島里)
원래 조선시대 각종 기록에는 구슬도(球瑟島)로 표기되어 있던 것이 후대에 옥도로 변함.섬의 모양이 옥(玉)자
처럼 생겨서 옥도라 했다는 설도 있음.
놀자리, 큰몰, 뻘구미, 허박 마을로 합해진 곳.
신 의 면(新衣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거지산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안파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장산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나주목에 속함
ㅇ 1892년(고종 29) 광주목에 이속
ㅇ 1896년(고종 33) 지도군에 속함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무안군 하의면에 속함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74. 10. 18 하의면에 상하태 출장소 설치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하의면 상하태 출장소에서 신의면으로 승격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리 일부인 고사도, 평사도, 송도를 신의면으
로 편입
명칭유래
1983. 2. 15 하의면 상하태출장소에서 면으로 승격되면서 새로운 면이라 하여 신의면으로 칭함.
□ 상태서리(上台西里)
태도의 서쪽 마을이 되므로 상태서라 함.마을이 안산과 뒷째봉의 사이에 위치하며 서쪽에 있다하여 서리,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동면, 뒤편 고개 뒤에서 보면 마을이 크게 보였다 작게 보였다 하는 소장동,마을이 넓
고 농토가 많다하여 붙여진 염분동, 마을에 길이 많아 흔질, 소나무가 무성한 송도로 형성.
□ 상태동리(上台東里)
상태도의 동쪽이 되므로 상태동이라 함.
목화재배를 하면서 마을 아낙들이 부르는 노래가락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가락마을, 3개 마을이 산모퉁이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라는 모롱(묘농)과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신촌으로 합해진 곳.
□ 하태서리(下台西里)
하태도의 서쪽 마을이 되므로 하태서라 함.
재주가 많은 아이들이 출생한다하여 기동, 마을 터가 좋은 곳이라는 황성,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는 신촌,마을모
습이 긴 동굴처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굴암 마을이 합해진 곳.
□ 하태동리(下台東里)
하태도의 동쪽 마을이 되므로 하태동이라 함.윤씨와 홍씨가 함께 이주해 좌우에 살았다하여 붙여진 윤촌,
홍촌 큰 고목이 있어 마을을 지켜준다 하여 붙여진 노은, 마을 형태가 둥글다하여 붙여진 원목 마을이 합해진
곳, 고평사도리(高平沙島里)산이 없고 모래가 많이 있다하여 붙여진 평사도, 높은 산이 있고 모래가 많다하여
붙여진 고사도의 이름을 따서 고평사도라 하였음.
장 산 면(長面山)
연 혁
□ 상고시대
ㅇ 마한에 속함
□ 삼국시대
ㅇ 백제 물아부(勿阿部 ) 거지산현(居知山縣)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757년(신라 경덕왕 16) 거지산현을 안파현으로 개칭 압해군에 영속
□ 고려시대
ㅇ 940년(고려 태조 23) 안파현을 장산현으로 개칭 나주목에 속함
□ 여말 선초기
ㅇ 장산현이 나주목으로 읍치를 옮김(현 왕곡면 장산리 추정)
□ 조선시대
ㅇ 1891년(고종 28) 나주목 장산도에 대한 읍진(邑鎭)의 침탈을 막기 위해 영광군에 이속 - 1896년(고종
33)지도군에 이속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무안군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3. 1. 1 법률 제1175호로 진도군 조도면 마진도리(마진, 율도, 저도)를 장산면에 편입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90. 8. 1 대통령령 제13046호 시군자치구의 관할 구역 변경에 의하여 저도(소저도, 작도, 송도, 골도,희
어도)가 진도군 진도읍으로 이속
명칭유래
삼국시대 백제 때는 거지산현(居知山縣), 통일신라 때는 안파현(安波縣), 고려 때는 장산현(長山縣)이라 하
였으며, 산줄기가 오음산에서 아미산을 거쳐 대성산에 연결되고, 여기서 비둘기산, 부학산, 중용마을 뒷산을 거
쳐 활목마을 앞산까지 산줄기가 끊기는 데 없이 길게 연결되었다 하여 장산(長山)이라 칭함.
□ 음리(五音里)
오음산이 다섯 봉우리이고 예로부터 노래를 잘하는 명창이 배출된 소리의 고장으로, 오음산 밑이 되므로 오름,
오음이라 함. 북쪽 어귀 바닷가에 위치한 북강, 마을터가 포구이고 오음마을 뒤에 있다하여 뒷벌, 황새형국의
한새골, 우물의 물맛이 좋다는 시미, 옛날 대가 많이 있었고 서쪽 끝머리라 하여 대머리라 한 마을로 형성된 곳
임.현재 오음, 북강, 앞면, 뒷벌(後浦), 한샛골은 오음1리,시미, 광포, 동구섬, 신촌, 대머리는 오음2리로 이루어져
있음.
□ 대 리(大 里)
장산면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마을이 크다하여 큰몰, 큰말, 큰동네, 대리라 함.
장산현의 곳집이 있었다하여 창몰(倉村)과 대신이 살았다는 대신터, 장산목장의 통문이 있었다는 목에(項
里), 마을 앞 제방이 세 번째 완공되었다 하는 삼방마을로 형성된 곳임, 현재 대리, 창몰(倉村), 새트몰(新村),
대신터는 대리1리, 목에, 삼방은 대리2리로 이루어져 있음.
□ 도창리(道昌里)
옛날 조세(租稅)와 환곡(環穀)을 보관하던 곳집인 창고가 있었다하여 도창이라 함.
사창과 마을 뒤 아미산이 말(斗)에다 곡식을 가득 담아 놓은 형국이라한 두동 마을로 형성된 곳임, 현재 도창은 도창
1리, 사창(건너몰), 두동(두말이)은 도창2리로 이루어져 있음.
□ 공수리(公需里)
고려시대 장산현(長山縣)의 공수전(公須田) 토지가 있어 공수촌, 공수라 하였고 면소재지 동쪽에 있는 마을
이라 하여 동면(東面) 이라고도 함.
마을 앞산이 배고픈 말이 풀을 먹는 형국이라하여 마초, 길게 형성된 마을 가운데 산이 있는 중산, 새가 집으
로 날아 들어오는 새집형국의 비소 마을로 형성된 곳임, 현재 공수, 마초는 공수1리, 중산, 비소는 공수 2리로 이
루어져 있음.
□ 팽진리(彭津里)
옛날 마을 앞에 팽나무군(群)이 있었고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팽진(彭津)·팽나리·팽나루라 함.활과 같이 생겼다
하여 활목(弓項), 마을 위치가 용의 가운데 형이라 하여 중용, 병풍을 펴 놓은 것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두루
메, 호랑이를 잡아 껍질을 벗겨 주저 앉혔다고 해서 호피, 용머리 처럼 생긴 상용, 마을터가 아래 쪽에 있는
하용, 마을 앞 바닷가 모래가 가깝다는 사근, 백구(갈매기)가 나는 형태의 백야도 마을로 형성된 곳, 현재 팽
진, 활목(弓項), 중용, 신촌, 두루메, 호피는 팽진1리, 상용, 하용, 사근, 백야는 팽진2리로 이루어져 있음.
□ 다수리(多水里)
대성산 자락에 마을이 형성되어 다수동, 다수라 함, 나룻배가 건너 다니던 나루터라 하여 어도, 옛날 성주가 살았던
곳 이라 하여 성주골, 섬에 금줄기가 있다 해서 막금도, 마을의 생김새가 통(桶)과 같이 생겼다 하여 통두, 반달
처럼 보이는 형국이라 하여 월산,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는 신촌 마을로 형성된 곳임. 현재 다수동은 다수
1리, 어도, 성주골, 막금은 다수 2리, 통두, 월산, 신촌은 다수3리로 이루어져 있음.
안 좌 면 (安佐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기좌도는 아차산현, 안창도는 거치산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기좌도는 압해군에 안창도는 안파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기좌도는 압해군에 안창도는 장산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기좌도는 영광군에 안창도는 나주목에 속하다가 이후 기좌도, 안창도 모두 나주목에 속함
ㅇ 1896년(고종 33)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좌면이라 하여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무안군에 편입
ㅇ 1917년 안창면과 새로 완도에 편입된 팔금면 전역을 통합하여 안좌면 으로 개칭
□ 대한민국
ㅇ 1964. 8. 2 무안군 조례 제86호로 안좌면에 팔금도출장소 설치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80. 3. 17 신안군 조례 제413호로 자라도출장소 설치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안좌면 팔금도출장소가 팔금면으로 승격
명칭유래
안창도(安昌島)와 기좌도(箕佐島)의 이름을 따서 안좌 면으로 칭함.
□ 금산리(琴山里)
지형이 거문고형이라 금산이라 하였음.
지형이 돼지 모양이라하여 저도라고 불리는 제섬이 합해져 형성된 마을.
□ 탄동리(炭洞里)
숯을 굽던 곳이라하여 예로부터 숯고랑, 숯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한자 어로 표기 시에 탄동이라 함.
□ 산두리(山斗里)
마을이 산 밑에 위치하며 지형이 말(斗)의 형국이라하여 산두라 함.
산의 북쪽이 되므로 산두라 하였다는 설도 있음.
□ 대 리(大 里)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전에는 큰 몰, 큰 말이라 부르다가 이후 대리라 하였음.
□ 복호리(伏虎里)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 감 바위라 부르다가 지형이 엎드린 범의 형국이라하여 복호라 하였음.마을이 두 골짜기
밑에 위치한다하여 양골이라는 마을이 합해진 곳.
□ 자라리(者羅里)
지형이 자라 형국이라하여 자라로 칭함.
마을 동남쪽의 산이 시루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증산 마을과 부엉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휴암 마
을이 합해진 곳.
□ 존포리(存浦里)
마을 앞에 작은 개(浦)가 있었다하여 종개라 부르다가 이후 존포로 개칭.
존포마을 인접에 있는 부속도서란 뜻의 부소도와 합해진 곳.
□ 향목리(香木里)
마을 앞에 향나무가 자생한다하여 전에는 향낭그미, 향목동리라 부르다가 이후 향목이라 부르게 됨.학이 내려와
앉았다는 학하리와 합해진 곳.
□ 여흘리(如屹里)
마을 서쪽에 있는 개울이 열목이라하여 물살이 세게 흐르는 여울가 이고 마을이 큰 산 밑에 위치 하여 다른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있다 하여 여흘이라 함.
□ 남강리(南江里)
기좌 남쪽의 갯가가 되므로 남강이라 함.옛날에 나라의 말을 길렀다하여 마등(馬嶝), 나룻가로 마을 앞에 여울
이 있어 열등이라 한 마을이 합해진 곳.
□ 대척리(大尺里)
마을 뒷산인 척산의 큰 마을이므로 전에는 큰잣매라 부르다가 대척리라 개칭. 큰 마을 작은 마을이라는 뜻의
대척, 소척 마을이 합해진 곳.
□ 창마리(唱馬里)
마을의 형국이 말이 춤추는 모양이라하여 창마라 칭함.
자연마을인 창마와 원두가 합해진 곳.
□ 소곡리(所谷里)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있고 뒤에는 골짜기로 되어 있다고 하여 바실, 소곡이라 함. 둥근 산 밑의 마을이라는
두리가 합해진 곳.
□ 박지리(朴只里)
마을의 지형이 박 형국이라하여 바기섬, 배기섬, 배기라 부르다가 박지라 함.
□ 반월리(半月里)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이라 하였음. 가장 큰 마을이라하여 큰몰, 대리라고도 함. 지형이 반월도
를 바라보는 옥토끼 같다하여 토촌 또는 퇴촌마을이 합해진 곳.
□ 구대리(舊垈里)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있었다하여 구대라 함소의 눈처럼 생겼고 안쪽마을이라 붙여진 내우목과 바깥
마을의 외우목이 합해진 곳.
마명리(馬鳴里)매봉산 밑 들녘 옆이 된다하여 매우리, 매워리라 불렀으나, 매봉산 초장에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마
명이라 함.
□ 신촌리(新村里)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하여 새몰이라 부르다가 이후 신촌이라 개칭.
꿩이 많다 하여 치동이라 부르다가 대금이라 개칭한 마을이 합해진 곳.
□ 대우리(大芋里)
우엉이 많은 큰 마을이라하여 대우동, 대우라 함.지형이 사두처럼 생겼다 하여 비아목이라 부르다 이후 비하라
개칭한 마을과 합해진 곳.
□ 방월리(方月里)
달이 뒷산인 봉산에 걸리는 마을이라 하여 방월(傍月)이라 부르다가 이후 방월(方月)로 개칭.
마을 뒤산이 진머리 바깥쪽이 된다하여 밖진머리라 하다가 전진이라한 마을과 합해진 곳. 고인돌 유적이
보존되어 있음.
□ 내호리(內湖里)
소와섬(송도)의 안쪽 섬이라하여 안소라 부르다가 내호로 개칭.
소와섬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여 이름 붙여진 내호와 외호마을이 합해진 곳.
□ 한운리(閑雲里)
마을 위치가 서쪽(하늬)에 있다하여 하누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한운이라 개칭.
모래가 많은 곳으로 지형이 꿩 형국이라는 사치 마을이 합해진 곳.
□ 시서리(柿西里)
마을에 감나무가 많이 자생한다하여 감나무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서쪽 마을이라하여 시서로 개칭.자연마을
인 시서와 오동나무가 많은 오동이 합해진 곳.
□ 읍동리(邑洞里)
마을의 위치가 골짜기 안쪽이라하여 전에는 골안이라 부르다가 이후 면의 중심 마을이라 하여 읍동이라
개칭 많은 곳으로 지형이 꿩 형국이라는 사치 마을이 합해진 곳.
팔 금 면(八禽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차산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압해군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는 나주목에 속하다가 이후 영광군에 이속 되었으며 후기에는 다시 나주목에 속하다가 이후 완도
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년 무안군에 편입
ㅇ 1917년 완도에 속하다가 무안군 안좌면에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64. 8. 2 무안군 조례 제86호로 안좌면에 팔금도출장소 설치
ㅇ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안좌면 팔금도 출장소에서 팔금면 으로 승격
명칭유래
ㅇ 여덟 마리의 날짐승 설에 의하면 본도의 주산(主山)인 닭메산[금당산], 장촌의 백기도(白?島-되강오리),
오만구지[원앙새], 원산의 작두(鵲頭)지[까치머리],비로(飛鷺)지[나는백로], 조만(鳥彎)이[까마귀], 이
목의 부소(鳧巢)지[물오리], 진고의 조림(鳥林)이[까마귀]라고 하여 팔금이라는 설과, 여덟 개의 명당(明堂)설
에 의하면 여덟 개의 날짐승 이름이 들어간 팔(八)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나 밝혀진 바는 없음.
ㅇ 여덟 개의 유인도설에 따르면 본도, 백기도(白?島), 원산도, 모도(茅島-띠섬), 거문도(巨門島), 해도(海島), 고산
도(高山島), 거사도(巨沙島)등 옛날 사람이 산섬의 팔(八)과 날짐승 지명이 많아 금(禽)을 합쳐 팔금이라 하였음.
□ 장촌리(長村里)
마을에 개울을 건너다니던 낡은 다리가 있어서 사근다리라 부르다가 이후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하여
장촌이라 개칭.
마을 앞에 다리가 있었다하여 고교, 흰 닭이 살았다하여 백계(白鷄), 소금을 이고 다니는 길이라 붙여진 소금목
마을이 합해진 곳.
□ 대심리(大深里)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대심이라 하였음.큰 골짜기 안의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이라는 뜻의 대심리
와 소심리, 마을 큰 산 위에 위치한 대산두 마을이 합해진 곳.
□ 원산리(元山里)
멀리 떨어진 산 밑으로 멀메 또는 원산이라 하였음.마을 뒤편에 경치와 형세가 좋은 명산이 자리 잡고 있어
원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음,
긴 마을의 목에 위치한다하여 이름 붙여진 장목과 원산 후미에 있는 서근 마을이 합해진 곳.읍 리(邑 里)골짜
기 안이라 하여 골안이라 하였으며, 이후 읍동(邑洞)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읍리라 함.산골짜기 산등 위에 있
는 마을이라는 읍산두와 잔디가 많아 붙여진 띠 섬이 합해진 곳.
□ 진고리(眞古里)
둔봉(둔버리)와 오림(오리미) 사이에 있는 긴 곶의 밑이 되므로 진구지 또는 진고라 하였음.까마귀가 많이
산다하여 이름 붙여진 오림과 산봉 우리가 모여 있는 형상이라는 둔봉 마을이 합해진 곳. 이목리(梨木里)마을
이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배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라 하여 배나골, 배낭골 이라 부르다가 후에 이목(梨木)이
라 함.
학문을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거문도와 매화가 많이 자생한다는 매도 마을이 합해진 곳.
□ 당고리(唐古里)
마을 뒤편에 대나무 밭이 길게 형성되어 있고, 제사를 모시는 당(堂)이 있었다하여 당고(堂古)라 부르다가
고산(高山)에 올라가 이 마을을 보니당나귀처럼 생겼다하여 당고(唐古-땅구지)라 함.신당이 있는 지역이
곶(串)이 되므로 당고지, 당구지 또는 당고라 하였다는 설도 있음,
높은 산이 있어 고산, 모래가 많은 섬이라 하여 거사도 마을이 합해진 곳.
암 태 면(岩泰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노현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ㅇ 압해군의 영속인 갈도현에 속함
□ 고려시대
ㅇ 영광군의 영속인 육창현에 속함
□ 조선시대
ㅇ 초기에는 나주목에 속하다가 이후 영광군에 이속 되고 후기에는 다시 나주목에 이속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이 폐지되고 무안군의 신설로 무안군에 편입
ㅇ 1917년 선도면 당사도를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 2059호로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명칭유래
산마다 돌이 많이 흩어져 있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하여 암태도로 유래되었음.
□ 단고리(短庫里)
지금의 장고리, 단고리를 합하여 진구지라 하였는데 마을형태가 큰짝, 작은짝이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으
며,진고(振庫), 진고(眞庫)로 불리어 오다가 단고로 개칭.예전에 씨족간의 파벌을 조성하기 위해 단고(김
씨)와 장고(박씨)로 나누었다는 설이 있음.
□ 와촌리(瓦村里)
옛날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다하여 기와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와촌이라 개칭.
마을이 옮겨와 새로운 터라하여 신기, 마을을 지나는 말들이 지형을 보고 심히 울었다는 마명, 옛날 금이 많이
나왔다 하여 황구리, 황금, 또는 중흥이 합해진 곳.
□ 도창리(道昌里)
옛날에 큰 도(都)머리 창고가 있다하여 도창리(都倉里)라 부르다가 도창(道昌)으로 개칭.
□ 수곡리(水谷里)
마을에서 북동쪽 3km 지점에 있는 승봉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 서해바다로 연중 마
르지 않고 흐른다하여 수곡이라 하였음.
바닷가 마을인 신변, 개의 형국이라하여 개섬, 또는 가섬, 나뭇잎이 떨어져 비옥한 땅이 됐다 하여 붙여진 추엽
마을이 합해진 곳.
□ 오상리(五相里)
옛날 어느 정승이 이곳을 지나면서 마을 뒷산의 산세를 보고 다섯 정승이 나오겠다고 하여 오상이 하였음. 다섯 봉
우리 밑이 되므로 오산 또는 오상 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음.목도, 천포, 신정이 합해진 곳.
□ 기동리(基洞里)
마을의 터가 아주 좋다하여 텃골 또는 기동이라 하였음.마을 뒷산에 당이 있어 당산,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어서 구룡동이라 부르다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이름 붙여진 오산이 합해진 곳.
□ 송곡리(松谷里)
아리실로 불리어 오다가 1880년경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송곡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음.활의 목과 같
다는 데서 유래한 활목(弓項), 해당화가 많다 하여 붙여진 해당 마을이 합해진 곳.
□ 신석리(新石里)
최초로 해남 윤씨가 입도 하였다 하여 윤동이라 하였다가 새로 옮긴 곳이라는 뜻에서 신석이라 하였음. 마을
의 생김새가 거문고와 비슷하고 앞산 모양이 선녀가 거문고를 타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탄금, 오동나무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 오도 마을로 형성 신석, 탄금, 익금, 오도가 합해진 곳.
□ 당사리(唐沙里)
당(堂)이 두 개 있고 마을 뒤에는 모래가 많아 당사(堂沙)라 하였고, 당나라때의 양자강 모래가 이곳까지 흘러온
섬 이라하여 당사 라고도 함.
압 해 면(押海面)
연 혁
□ 삼국시대
ㅇ 백제의 아차산군, 거지산현, 고록지현으로 분포
□ 통일신라시대
ㅇ 757년(경덕왕 16) 아차산군이 압해군으로 개칭
ㅇ 거지산현, 고록지현을 각각 안파현, 염해현으로 개칭, 갈도현 압해군(壓海郡)에 영속됨
ㅇ 892년(진성여왕 6) 견훤 광주 기병으로 그 세력안에 들어감
ㅇ 909년(견훤 18) 왕건이 고이도를 공격하자 도민이 싸우지 않고 항복함
ㅇ 고이도가 무너지고 태봉국에 속함
ㅇ 918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자 후백제 견훤의 세력이 됨
□ 고려시대
ㅇ 935년(태조 18) 압해군이 나주목의 속현이 됨
ㅇ 940년(태조 23) 압해군이 현(縣)으로 강등 나주목에 영속
□ 여말선초기
ㅇ 압해현 나주로 읍치(현 영산포)를 옮김
□ 조선시대
ㅇ 나주목에 속함
ㅇ 1891년(고종 28) 압해도에 대한 읍진(邑鎭)의 침탈을 막기 위해 영광군에 이속
ㅇ 1896년(고종 33) 지도군이 설치되어 지도군에 편입
□ 일제강점기
ㅇ 1914. 3. 1 지도군이 폐지되고 무안군에 편입
ㅇ 1917년 선도면의 고이도, 매화도를 편입
□ 대한민국
ㅇ 1969. 1. 1 법률 제2059호로 무안군에서 신안군 분 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ㅇ 1971. 6. 1 신안군 조례 제35호로 압해면에 매화도 출장소 설치
명칭유래
섬의 지세가 삼면으로 퍼져 있어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압해라 칭함.
□ 복용리(伏龍里)
마을의 생김새가 한 쌍의 큰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하여 복용(伏龍)이라 함. 새로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신대, 용
왕께 제사 지냈던 섬인 상도, 용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하여 남촌, 부자가생길 마을이라 한 신흥, 소나무 숲
으로 싸인 송림, 소와 비슷하다하여 유래된 우간도 마을로 합해진 곳.
□ 가룡리(駕龍里)
마을의 주산에서 뻗어 내리는 산줄기가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전에는 가룡굴이라 부르다가 가룡이라 함.
김해 김씨가 터를 잡았다는 금기, 학이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의 무학동, 마을이 용의 꼬리 부분이라는 하용 마
을이 합해진 곳.
□ 신용리(新龍里)
마을 위치가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동남북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지형이 낮아 용이 살기에 적당하며,
계곡 양편에 용이 모여 살았다 하는 회룡(會龍)마을과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회신(會新)마을
의 이름을 따서 신용이라 함.
□ 학교리(鶴橋里)
마을 지형이 학이 날아가고 있는 형상이라하여 학동,옛날에 마을 앞이 바다로 되어 있어서 마을로 들어가 려
면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서 들어가기 때문에 목교(木橋)마을이라 칭해진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학교라 하였
음.
□ 동서리(東西里)
동서리(東西里)면사무소가 있을 당시에는 큰 몰이라고 했으며 무안군에 속해 있을때는 압해 신서라고 함.
그후 서쪽에 있다하여 서촌이라고 한 마을과 동촌과 서촌의 사이에 언덕이 있는데 언덕의 동쪽에 있다하
여 동촌 이라고 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동서라 하였음.
□ 대천리(大川里)
큰 벌판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대벌이라는 마을과 마을 지형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새
장안 또는 조천(鳥川)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대천이라 하였음.
큰 들과 마을이 생겼다하여 야항, 마을이 갓의 형상인 광립, 바닷가에 형성된 수락 마을로 형성 조천, 야항,광
립, 대벌, 수락, 반월이 합해진 곳.
□ 송공리(宋孔里)
송공산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송공이라 하며,상촌 마을과 도둑이 자주 침입하여 송공산 주변에 흩어
져 살고 있는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살았다는 대촌마을이 합쳐진 곳.
□ 분매리(盆梅里)
지형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동이 같이 생겼고, 마을이 형성된 자리는 매화꽃 같이 생겼다하여 분매
라 하였음. 원분매, 숭의촌, 신기, 거룡, 상장천 마을이 합쳐진 곳.
□ 신장리(新庄里)
장감에서 나누어져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신장이라 함.
마을 앞 우물 물을 용이 먹고 살았다 해서 용정, 마을이 번창 할 것이라 한 수만, 연꽃이 피어 있는 모습의 수련
마을로 형성. 원신장, 용정, 수만, 수련, 태도,의금 마을이 합쳐진 곳.
□ 장감리(長甘里)
마을의 동쪽, 서쪽,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단감과 같이 생겼다하여 장감이라 함.
옛날 텃굴이라 불린 기동, 토기를 구웠다는 연막, 우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정동 마을이 합쳐진 곳.
□ 가란리(佳蘭里)
최초에는 살기가 어려운 곳이라하여 가난도라 부르다가 이후 자연란(蘭)이 많이 자생한다 하여 가란으로
개칭.
□ 고이리(古耳里)
지형이 고양이 모양이라 하여 고이섬 또는 고이로 칭함. 옛날 장터가 있었고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대촌, 일
곱 마을이 합쳐졌다는 칠동, 장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고장, 마을 뒷산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 사동 마을이
합쳐진 곳.
□ 매화리(梅花里)
지형이 매화꽃이 피어 있는 형상이어서 모양섬, 매화섬, 모양도라 부르 다가 이후 매화라 하였음.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학동, 푸른 돌이 많은 청석, 장군봉에서 내려온 산줄기 머리 부분에 형성되었다
고 하여 산두, 지형이 마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산, 토질이 황토로 되어 있는 황마도 마을이 합쳐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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